강남역 근처 한 룸살롱의 금요일 밤 9시.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리셉션 앞에 선다.
"혼자 오셨어요?"
"네."
"술은 어떤 걸로 준비해드릴까요?"
"아... 전 술 안 마셔요. 콜라나 사이다 있나요?"
5년 전이었다면 직원들이 당황했을 테지만 2025년 현재 이런 손님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. 오히려 하루에 서너 명은 기본이다.
술 없는 술집의 등장
유흥업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. 취한 사람들과 술병이 가득한 테이블 그리고 건배 소리. 하지만 현장의 모습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변하고 있다.
현장에서 목격한 변화
내가 강남에서 영업실장으로 일한 지 12년. 처음엔 나도 이해가 안 됐다. 술도 안 마시면서 왜 여기 오나?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. 그들이 찾는 건 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다.
28살 프로그래머 K씨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이었다. 그는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왔다. 항상 혼자였고 주문은 언제나 콜라였다.
"저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어요.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응급실 가요."
처음엔 그게 이유의 전부인 줄 알았다. 하지만 몇 주가 지나자 진짜 이유가 드러났다.
"집에 혼자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. 회사에선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고 집에 가면 또 혼자. 여기라도 와야 사람 목소리를 들어요."
숫자로 보는 무알코올 트렌드
우리 업소 기준 술을 전혀 마시지 않거나 거의 마시지 않는 손님의 비율:
2020년: 전체 손님의 3%
2022년: 8%
2024년: 15%
2025년 현재: 18%
이들의 평균 체류 시간은 오히려 술 마시는 손님보다 길다. 술 마시는 손님 평균 3시간 안 마시는 손님 평균 4시간. 재방문율도 높다. 일반 손님 40% 무알코올 손님 65%.
왜일까?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.
외로움이라는 현대병
정신과 전문의들은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로 '외로움'을 꼽는다. 특히 20-30대 1인 가구의 외로움은 심각한 수준이다.
SNS로 연결된 것 같지만 실제론 더 고립된 삶. 수백 명의 인스타 팔로워가 있어도 지금 당장 만날 사람은 없는 현실.
35살 디자이너 P씨의 고백:
"친구들? 다 결혼했어요. 주말에 만나자고 하면 가족 약속 있다고 하고. 평일 저녁? 다들 야근이래요. 근데 저도 막상 퇴근하면 심심하거든요."
그가 우리 업소를 찾는 이유는 명확했다. 예약 없이 언제든 바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. 비록 돈을 내고 만나는 관계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.
즉시 충족 가능한 인간관계
24시간 편의점처럼 유흥업소는 '즉시 충족 가능한 인간관계'를 제공한다.
42살 의사 L씨는 이렇게 표현했다:
"병원에서 하루 종일 환자 보고 집에 가면 텅 비어 있어요. 친구한테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. 근데 여긴 새벽 2시에 와도 반겨주는 사람이 있잖아요."
그는 위스키 한 병을 시키지만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. 대신 이렇게 말한다:
"다음에 친구들이랑 올 때 마시게 보관해주세요."
실제로 우리 업소엔 이런 '보관 술'이 50병이 넘는다. 주인이 다시 찾아올 확률? 30% 미만이다. 하지만 그들에게 그 술병은 '다시 올 이유'이자 '연결고리'다.
새로운 관계의 형태
전통적인 유흥업소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. 손님이 돈을 내고 매니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. 하지만 술을 안 마시는 손님들과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.
매니저 입장에서도 이들은 특별하다. 25살 매니저 J양의 경험담:
"술 안 마시는 손님들이 오히려 대화가 깊어요. 취하지 않으니까 기억도 다 하시고 다음에 와서 '지난번에 얘기한 그거 어떻게 됐어?' 물어보시고. 진짜 친구 같은 느낌?"
실제로 이들의 대화 주제는 다양하다. 일상적인 고민부터 철학적 질문까지.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아니 오히려 술이 없기에 더 진솔한 대화가 오간다.
세대별 특징과 경제적 관점
업주 입장에선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. 술 마진이 없으니 수익성이 떨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.
각 세대의 무알코올 선택 이유
20대: "술 마시면 운동 못 해요"
건강에 민감한 MZ세대. 크로스핏 다니고 단백질 섭취량 계산하는 이들에게 알코올은 독이다. 하지만 사회생활은 해야 하고 네트워킹도 필요하다. 그들의 선택은 '술 없는 유흥'이다.
30대: "내일 출근해야 하는데..."
워라밸을 외치지만 현실은 야근. 스트레스는 풀고 싶지만 내일 컨디션도 중요하다. 콜라 마시며 2시간 수다 떨고 11시에 귀가. 완벽한 금요일 저녁이다.
40대: "건강 검진에서 걸렸어요"
지방간 고혈압 당뇨... 40대가 되면 하나씩 찾아오는 불청객들. 의사가 금주를 명령했지만 사회생활을 포기할 순 없다.
50대: "이제 술이 안 받아"
예전 같지 않은 몸. 소주 한 병이면 이틀을 고생한다. 하지만 젊은 직원들과의 소통은 필요하다. 차 한 잔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.
업주 입장에서 본 수익성
술을 안 마시는 손님의 특징:
사고 칠 확률 제로 (취객 트러블 없음)
장시간 체류 (시간당 룸 차지 증가)
높은 재방문율 (안정적 매출)
팁 문화 정착 (술값 대신 팁으로 보상)
구전 마케팅 효과 (독특한 경험 공유)
청담동에서 룸살롱을 운영하는 최 사장의 계산:
"술 마시는 손님 한 명이 쓰는 돈이 300만 원이면 안 마시는 손님은 150만 원 정도. 하지만 술 손님은 한 달에 한 번 무알코올 손님은 일주일에 두 번. 결과적으로 월 매출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아요."
현장의 적응과 변화
처음엔 매니저들도 당황했다. 술을 권해야 하나?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?
매니저들의 새로운 서비스
27살 매니저 S양의 시행착오:
"처음엔 자꾸 '진짜 안 드세요?' 하고 물었어요. 그러다 깨달았죠. 그분들은 술 마시러 온 게 아니구나. 그냥 편하게 대화하면 되는구나."
이제는 매뉴얼도 생겼다. 무알코올 손님 응대법:
음료 메뉴 다양화 (수제 차 스페셜 논알코올 칵테일)
대화 중심 서비스
시간 압박 없애기
편안한 분위기 조성
과도한 스킨십 자제
물론 문제도 있다. 일부 손님은 이를 악용한다.
"술도 안 마시는데 왜 이렇게 비싸요?"
"서비스가 별로네요. 술값도 안 내는데."
이런 손님들은 본질을 오해한 경우다. 유흥업소는 술을 파는 곳이 아니라 '시간과 공간과 경험'을 파는 곳이다.
또 다른 오해는 사회적 시선이다. "술도 안 마시면서 왜 그런 데 가?" "더 이상한 거 아니야?"
하지만 이런 편견도 서서히 깨지고 있다.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'각자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'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있다.
미래 전망과 새로운 정의
앞으로 무알코올 손님은 더 늘어날 것이다.
예상되는 변화:
전문 상담 서비스 결합
웰니스 프로그램 도입
무알코올 전용 공간 확대
구독형 멤버십 도입
AI 매칭 시스템 활용
일부 업소는 이미 변화를 시작했다. 논현동의 한 룸살롱은 '티 소믈리에'를 고용했고 청담동의 한 클럽은 '명상 룸'을 만들었다.
술을 안 마시는 손님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. 유흥업소의 본질적 기능이 변하고 있다는 신호다.
과거: 술 + 여흥 = 유흥업소
현재: 소통 + 위로 + 경험 = 유흥업소
누군가는 이들을 비웃을지 모른다. "술도 안 마시면서 왜 그런 데 가?"
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에서 현대 도시인의 고독을 본다. 연결되어 있지만 외로운 바쁘지만 공허한 사람은 많지만 친구는 없는 그들의 삶을.
내 역할은 술을 파는 것이 아니다. 그들에게 잠시나마 '혼자가 아니라는 느낌'을 주는 것이다. 비록 돈으로 산 관계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을 담아.
매주 목요일 7시 콜라만 마시는 K씨가 또 올 것이다. 나는 그를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.
"어서오세요. 평소 드시던 콜라 준비할게요."
그것이 2025년 술 안 마시는 손님을 맞는 우리의 방식이다.